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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현대미술관회

‘안녕, 보이스!’


요셉 보이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Joseph Beuys / 1921-1986



우순옥 (작가,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

Joseph Beuys(1921-1986)
Joseph Beuys(1921-1986)

올해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독일을 비롯한 유럽 곳곳,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까지 ‘Beuys 2021’재단 주최·협조로 그의 업적을 조명하는 수많은 전시, 영화, 방송,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일 년 내내 온·오프라인으로 개최되고 있다. 그 대대적인 규모를 보면 요셉 보이스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예술가 이며 사랑받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내가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예술대학)에 입학했을 땐 요셉 보이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독일 현대미술의 대부와도 같았던 요셉 보이스와 주요 활동 장소였던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를 찾아 떠난 유학길에서 아쉽게도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보이스가 남기고 간 수많은 교훈을 통해 예술이 인간 정신성 회복에 기여하고 인류의 파멸을 막는 길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팽배한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정신성이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곳곳의 자연 환경이 파괴되어 몸살을 앓고 있으며 팬데믹으로 전 세계 인류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보이스의 정신적이고 예술 생태학적인 가르침이 더욱 소중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예술이 곧 그의 삶이었던 보이스는 예술교육을 통해 통합된 사회교육, 더 나아가 인간교육을 꿈꾸었고 그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어느덧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내가 경험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해보고자 한다.



학교 가는 길


뒤셀도르프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주도로 ‘독일의 파리’라 불리는 라인강변의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에 유서 깊은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가 있다.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마치 로엔그린의 풍경처럼 호수에 백조가 노닐고 울창한 나무로 우거진 호프가르텐 숲길을 지나 학교 가는 길은 더없이 아름다운 힐링 그 자체였다. 때로 비바람이 불어올 때는 전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구시가지의 중심 하인리히 하이네 알레에서 하차 후, 라인강 방향으로 걷다보면 전설적인 갤러리 슈멜라와 콘라드 피셔가 있고 으레 하루 한 번씩은 들려 기웃거리던 미술 전문서점 발터 쾨니히도 지나면 곧 시원하게 탁 트인 그라베 광장을 만나게 된다. 그곳엔 오랜 기간 우정을 나눴던 백남준과 보이스의 대규모 회고전과 작고 5주년기념전을 1991년 11월 역사적으로 동시 개최했던 쿤스트할레와 현대미술관 쿤스트잠룽이 사이좋게 마주하고 있다. 그 뒤 아담한 클레 플라츠를 가로질러 아카데미 학생들의 아지트, 카페 슐론쯔와 눈인사를 마치면 이내 시원한 라인강바람을 뒤로 하고 우뚝 선 네오르네상스식 고풍스러운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아이스켈러 스트라쎄 1번지,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이다.

그곳엔 1960대부터 90년대까지 전후 독일현대미술의 중요한 1세대 작가들 - 요셉 보이스, 백남준, 귄터 우커, 게하르트 리히터, 사진의 베허 부부, ‘인젤 홈브로히’건축을 한 조각가 에르빈 헤리히 등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가히 유럽 현대미술의 1번지라 할 수 있던 곳이었다. 내가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수많은 예술의 질문과 고민들로 치열하게 밤을 지새우던 곳이기도 하다.


Joseph Beuys, Beuys Block 부분 중, Erdtelephon(일명,‘안녕, 지구’), 1967
Joseph Beuys, Beuys Block 부분 중, Erdtelephon(일명,‘안녕, 지구’), 1967

오마주 보이스


요셉 보이스 사후 몇 개월이 지난 1986년 가을 당시에도 보이스 교수연구실은 그가 창립한 ‘국제자유대학Free International University, 약칭 FIU’ 포스터가 붙어있는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카데미 안팎으론 끊이지 않고 보이스 관련 전시, 영화, 세미나 등이 이어졌으며 보이스풍(중절모를 쓰고 청바지에 낚시 조끼를 걸친)의 복장을 한 열렬 추종자들이 높고 긴 복도를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던 10월 어느 날, 보이스 연구실 천정코너에 설치되어 있던 보이스의 작품 ‘지방질 코너 Fettecke’가 청소부에 의해 제거된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뒤셀도르프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 사건은 수많은 논쟁과 빗발치는 항의로 인해 법정으로까지 가게 되었고 결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부에서 많은 손해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게 1986년 가을은 하루의 뉴스 시작이 요셉 보이스였다. 그 소란함과는 달리 나의 관심을 끌었던 또 하나는 보이스 연구실 문에 수수께끼처럼 붙어있던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타원형의 사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고요하고 신비스러운 미소. 보이스가 다빈치에게 매료되었듯이 나 역시 그가 부재하는 그의 문 앞에 서서, 그가 바라보았을 그 모나리자를 매일같이 말없이 바라보는 사이 그것은 어느새 점점 나의 예술적 화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는 모자리자 이미지를 차용한 작업을 발표했다. ‘물질비물질-그림자 빛’이 그것이다. ‘누구나 이상을 이상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화할 때 그들은 그 스스로 이상과 실제를 함께 안은 살아있는 ‘모나리자’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각자 이처럼 살아있는 ‘모나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그 작품은 어쩌면 나의 ‘오마주 보이스’일 것이다.


Joseph Beuys, 7000 Eichen, Kassel 최근 풍경
Joseph Beuys, 7000 Eichen, Kassel 최근 풍경

보이스 블록, 7000그루의 참나무


1921년 독일 북서부 크레펠드에서 태어나 주로 클레베에서 성장한 보이스는 제 2차 세계대전시 종군 비행사로 출전, 사고로 추락하면서 그 지역 타타르 주민들로부터 간신히 구조되었고 지방(버터)과 담요(펠트)등으로 따뜻하게 감싸준 그들의 극진한 보살핌 끝에 되살아 났다고 한다. 그러한 실존적 경험으로 인해 그의 예술의 주재료중 하나로 지방(버터)과 담요(펠트)가 자주 등장하고, 그것은 생명, 에너지, 따뜻함(온기), 희망 등의 상징적 메시지와 함께 ‘보이스 신화’로 전해져 온다. 그의 신화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보이스는 적어도 논리만을 사용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모든 새로운 것은 언제나 혼돈의 상태로부터 유래한다고 믿었다.


Joseph Beuys, 7000 Eichen, Book
Joseph Beuys, 7000 Eichen, Book

보이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작품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생각, 사고 등 모든 형태의 정신적 행위도 드로잉, 조각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는 수없이 많은 드로잉과 조형물, 오브제, 설치, 퍼포먼스, 강연, 그리고 그가 강연시 사용했던 생각을 적은 칠판들까지 창조적인 행위 모두를 포괄하는 ‘확장된 예술개념’을 주장하며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직접적인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사회적 조각’이란 개념도 여기서 비롯된다. 자연과학, 인류학, 종교, 철학,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보이스의 작품들은 그의 개인적인 도상과 암시로 가득 차있으며 어떠한 영역으로도 범주화할 수 없고 관습적인 미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분명 신비주의적인 형태들이다. 특히 산업문명에 때 묻지 않은 자연물이나 원시성을 지닌 소수종의 동물들; 토끼, 사슴, 양, 백조, 꿀벌 등이 그의 드로잉의 대상이 되거나 죽은 토끼나 살아있는 코요테처럼 어느 특정 문화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물들은 그의 퍼포먼스에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밀납이나 지방덩어리 같은 유기적인 물질의 원형을 통해 인간에 내재해 있는 생명력과 자연과 시간, 운동 및 공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조형적으로 탐구하였다. 이외에도 펠트, 동판, 전지나 동력장치 등의 재료나 도구를 활용하여 에너지, 운반, 보관, 전달의 의미를 다양한 설치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그러한 그의 주요 작품의 290여 점이 독일 헤센Hessen주의 다름스타트Darmstadt미술관에 ‘보이스 블록Beuys Block’이란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보이스 작품을 이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가 없어 아쉽다. 그중 단 한 점을 택하라면 난 주저 없이 ‘7000그루의 참나무’를 택하고 싶다. 이 작품을 통해 폭넓은 예술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숭고한 가치를 느꼈다. 그로부터 어떤 인간성 회복과 실천적 삶에의 긍정적 희망, 그리고 무한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전달된다. 전쟁으로 인해 거의 90%의 파괴로 폐허가 되었던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카셀은 지금 보이스의 7000그루의 참나무로 인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도시 상흔의 치유와 예술의 부흥을 위하여 시작된 카셀 도큐멘타Documenta가 제7회를 맞이하던 1982년, 보이스는 전쟁의 이기심과 물질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살아있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일명 ‘생태사회학적 조각’으로 불리는, ‘7000그루의 참나무’ 심기 프로젝트의 첫 삽을 떴고, 많은 참여 희망자들이 그 나무심기 릴레이를 이어갔으며 보이스 사후엔 그의 아들 벤젤Wenzel이 제8회 도큐멘타가 열렸던 1987년 드디어 7000번째의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작은 묘목에 불과하던 나무들이 근40년이 지난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도시의 살아 숨 쉬는 허파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멋지고 감동스러운 아트인가! 보이스는 예술가이면서 독일 녹색당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기에 황폐했던 카셀에 ‘7000그루의 참나무’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에코 아트의 위대한 실천이라 말할 수 있다.


Joseph Beuys, 7000 Eichen 프로젝트 현장, 카셀도큐멘타, 1982
Joseph Beuys, 7000 Eichen 프로젝트 현장, 카셀도큐멘타, 1982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이다


과학과 의학에 관심이 있었던 보이스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정신을 치유할 수 있는 예술로 진로를 바꾼 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 입학, 약 8년간 수학하였고 1961년 그곳의 교수가 된다. 어느 날 보이스는 백남준과 플럭서스Fluxus그룹을 만나게 되면서 몇 년간 함께 플럭서스 활동을 하게 된다. ‘모든 만물은 창조의 흐름 속에서 유전한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말에서 인용한 ‘흐름, 변천’의 뜻인 플럭서스. 60년대 그 전위적인 운동의 온상지였던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의 아우라(강당)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플럭서스 퍼포먼스들은 미술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가 되었다. 쿤스트아카데미의 각 세미나는 누구나에게 오픈 강좌로 진행되었고 관심 있는 누구나 강의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이도, 직업도, 전공도 불문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섞여 강의를 듣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나이 지긋한 시인도 있고, 경제학자도 있으며, 방랑인 같은 연극인도 있고, 화랑을 경영하는 화상도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그들의 삶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하고 토론과 발표를 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모습은 당시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한국의 사회나 대학에서는 도저히 경험해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뒤셀도르프 젊은 학생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 일뿐만 아니라 열려진 마음으로 사회와 예술을 대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예술의 현장,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요셉 보이스가 주장하던 이상적인 아카데미의 한 단면일 것이다. 보이스가 떠난 뒤에도 쿤스트아카데미는 오랫동안 보이스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르는 채 오히려 더 분석하고 토론하며 그의 부재를 더욱 그리워하고 있었다. 당시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배운 예술적 톨레랑스와 자유는 지금도 내 마음 한 켠에 고스란히 살아남아있다.


요셉 보이스는 쿤스트아카데미 내에서 플럭서스 이념에 기초한 비정통파적인 교수법으로 젊은 학생들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하면서 이상적인 아카데미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예술=삶’, ‘예술=인간’, 또한 “예술은 하나의 유일한 변화의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성으로부터 나올 수 있고, 그 스스로 다른 관계들을 변화시킨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인간적인 출발점을 예술 안에서 대부분 확장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자본은 돈이 아니라 인간의 그 창조적 능력이다.” 이렇게 보이스는 끊임없이 자유민주적 사회주의 입장을 주장하고 쿤스트아카데미 보이스 클래스에선 적어도 1~2주일에 한 번씩 공개토론 시간을 가져, 많은 학생들과 아카데미 교수들, 교수가 초빙한 인사들 등등과 함께 종교적, 철학적 문제, 예술의 사회정치적인 개념으로까지 연결하여 토론의 장을 만들곤 했다.

보이스는 “교수는 아카데미 안에서 마치 하나의 질서의 원리처럼 잘 정선된 근본이 되어야 한다.”, “나의 최고의 예술은 나의 티칭이다.”고 주장하며 무엇보다도 물질 위에 선 정신Geist를 중요시했고 젊은이들이 무엇보다도 우선 먼저 사고(思考)에 종사할 수 있는 가능성, 인간의 진정한 정신성을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들은 1967년에 창당된 독일학생당(DSP)을 기초하고, 나아가 1977년 설립된 국제자유대학(FIU)의 뿌리가 된다. 차츰 젊은 예술가들은 삶속에서의 예술의 의미를 새로이 인식하게 되고 이를 실제공간에 옮겨 구체화시켜 보는 작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보이스는 1972년 인원수 제한의 입학허가에 대항하여 학교 점거 시위를 하였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로부터 해임을 당하게 된다. 보이스의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들은 사회 권력으로부터 제지를 받게 됨으로써 더욱 더 공공연하게 대중화 되어갔고, 유럽의 예술가, 비평가, 문화 인사들은 “보이스의 해직은 전 유럽의 아방가르드를 해직한 것과 마찬가지다!”며 대단위 서명운동과 시위로 투쟁에 이르게 된다. 오랜 법적 투쟁 끝에 보이스는 1978년 다시 복직이 되고 교수 연구실 사용 권리도 되찾았지만 그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보이스가 이상적 아카데미의 실현을 위해 설립한 국제자유대학FIU은 그의 생각과 행동들을 이론적 고정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유기적이고 원시안적인 변화 과정 안에서 더욱 더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어 나갔으며 그의 예술적 작품들은 순수한 내면성으로부터 점차 배양되어져 사회 각지로 녹아들어갔다. 플럭서스의 이념으로부터 생성된 보이스의 국제자유대학FIU 또한 넓은 의미로서의 예술 활동으로 볼 때 그를 통해 예술, 인간, 사회, 정치, 교육과 함께 새삼 우리들의 삶과 예술을 다시한번 성찰하게 된다. 그러한 ‘확장된 예술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미래를 위해 또 다시 창조의 노력을 부단히 계속하게 될 것이며 예술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세계의 창조가 진정한 예술의 가치이자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성 회복에 기여하는 유일한 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이스는 우리를 향해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그 스스로 이상적인 아카데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이다.” 그의 진정성 있는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저녁,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 보이스 100세 생일과 스승의 날 즈음이니 문득 저 멀리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다. “구텐탁, 보이스!”


*요셉 보이스 2021 관련행사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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