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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현대미술관회

비움의 미학, 생명의 아리아

L’esthétique du vide, L’aria de vie


권녕호의 근작,

그 문인화 정신과 이미지 추상의 이중주(二重奏)


장동광 (큐레이터, 평론가)




권녕호 작가의 회화는 프랑스 파리Paris라는 예술적 그릇에 한국의 전통 문인화 정신을 담은 만찬의 정경과 같다. 이 서로 합치될 수 없을 것 같은 문화적 이중성은 그 만의 독자적 세계로 현현(顯現)되고 있다. 1981년 파리로 건너가 1997년까지 16년간 파리에서 유학하고 작가활동을 하면서 보낸 권녕호의 궤적을 되돌아 볼 때, 파리의 예술적 전통과 한국적 정신이 자연스럽게 용해되는 결과가 되었으리라는 추론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세계주의적 경향성을 추스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한 사고의 단면은 작품의 재료에서부터 목격된다. 캔버스에 안료와 아크릴릭 칼라를 혼용하거나 한지 위에 수묵적 표현이나 연필 등을 사용한 것에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경계 없는 예술적 사유를 가늠하게 한다. 그의 통합적 사고는 물리적 재료선택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2006년도「중용의 미학-권녕호의 이미지 회화」라는 서문에서 “소재는 민화나 한국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기명절지를 연상케 하는 꽃과 과일이 담긴 접시가 주로 최근 들어서 빈번히 등장하고 있으며, 잘 드러나지 않는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근자에 들어와서 음과 양의 이중적 코드를 지닌 화면의 병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윤진섭 평론가가 2000년대 초반의 작품을 통찰한 글에서 지적했듯이, 민화나 문자도에서 포착 가능한 도상들이 번안되거나 변용되어 화면에 포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물상(物像)에 서양화의 붓질(흔적)로 조율된 회화적 헬레니즘, 그 세계성의 건축을 짓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의 기표(記表)적 형식뿐만 아니라 기의(記意)적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도 동양의 정신성과 서양적 제스처가 긴밀하게 합류하고 있었음을 권녕호의 2000년대 작품들은 명료하게 증거하고 있다.


작가는 파리생활 그리고 귀국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 회화전통의 정신과 영향의 세례 속에서도 자신 만의 독자적 회화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다채로운 실험을 거듭해 왔다. 특히 그의 <군상>을 주제로 한 초기작들이 지닌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들이나 콘테로 그린 크로키들은 고전주의적 인체해부학과 묘사력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가를 명료하게 증거하는 사례들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내면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동양적 미의식은 1990년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작품궤적을 형성하는 중요한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식물과 넝쿨은 한국적인 정서와 현실을 의미하고 기하학적 형상들은 현대적이고 서양적인 이상을 의미한다”는 비평적 지적은 그의 세계주의적 사유로서의 회화에 관한 이론적 깃발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또한 “극단을 피하여 다시 말해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그 중간의 위치에 서서 상생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적 사고의 요체라고 할 때, 권녕호의 그림은 그 사고에 관한, 혹은 그 사고로부터의 그림인 셈이다”라고 한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평론은 이러한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부상한다.


권녕호의 이번 근작들은 비움의 미학, 혹은 여백의 공간으로 조율된 회화의 영토에서 연주되는 서정적인 아리아이다.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기하학적 도상들과 무의식의 심층에서 길어 올려 진 즉흥의 흔적들, 아직 덜 성숙한 빛깔과 대지에 뿌리내리려는 강렬한 색채의 향연들이 하나의 악보처럼 직조되어 있다. 그의 근작들에는 한국의 전통건축 미학에서 회자되는 ‘배흘림 기둥’과 같은 무기교의 기교, 무작위의 작위, 꾸밈없는 자연성과 같은 한국적 미학이 전통에서 흘러 온 현재성의 물로 흐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권녕호의 그러한 생명에 관한 변주곡들이 연주되는 화폭 앞에서 헬레니즘적 회화의 새로운 영토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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