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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현대미술관회

찬란한 어둠, 유토피아의 이면에 대하여

이불 Lee Bul


안소연 (전시기획자, 전 삼성미술관 플라토 부관장)




우리 시대 미술가들 가운데 자기 혁신과 세계관의 확장을 향한 도전에 있어 이불만큼 집요하고도 대담한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지난 30여년 간 그가 펼쳐 낸 특이한 조형의 세계는 바늘 끝의 통각처럼 지극히 육체적이고 즉각적인 감각으로부터 광활한 상상의 지형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경험과 동시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근대의 문명을 조망하는 방대한 풍경들로 전개되었다. 아름다움과 찬란함으로 무장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공포와 파멸의 그림자를 동반하면서 우리를 양가적 감정으로 도취시킨다. 이는 기술의 진보와 불멸을 향한 유토피아적 욕망의 명암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길 권유하는 그의 진심 어린 초대이기도 하다.


1987년 20대의 나이로 미술계에 등장한 순간부터 이불은 도발적인 퍼포먼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구조에 반기를 든 그는 당시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된 한국미술계의 가부장적 계파에 흠집을 내면서 향후 신세대 미술과 여성주의, 몸의 담론을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인간의 내외부 장기나 동식물, 또는 기계의 혼성체인 몬스터 조형물을 제시하면서 여기에 물렁물렁한 촉감까지 더해 금기시된 여성성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불을 국제 미술계의 신성으로 자리매김한 <화엄>은 바늘로 꿰맨 싸구려 반짝이로 장식된 채 썩어가는 생선의 악취를 모티브로, 근대기 아시아 여성의 상투적인 이미지와 희생을 중층적으로 다루었다. 1997년이후 전개한 사이보그 조각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미래의 여성상을 제시하면서도 조립과 해체가 가능한 기계적 대상물로서 여성의 암울한 미래를 드러냈다.

이불은 2000년대 중반부터 <나의 거대서사>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 그간 그로테스크의 전략으로 여성의 몸을 통해 맞서고자 했던 근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이성이 성취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에 다름아니며 진보의 미명 하에서 지배권력에 의한 숱한 실패의 그림자를 역사에 드리운 바 있다. 이불은 J. F. 리오타르가 언급한 ‘거대서사의 종말’ 이후 분절과 재조립으로 자신만의 근대서사를 재구축해 보고자 했다. 크리스털과 거울, 조명으로 눈부신 이불의 거대서사에는 고담시티의 마천루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건축, 브루노 타우트의 유토피아적 행성 도시만이 아니라 마지막 왕손 이구의 벙커나 남영동 대공분실의 낡은 욕조처럼 현실의 절망적인 공간도 함께 등장한다. 작가는 조형물로 이룬 풍경이라는 전례 없는 방법론을 통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역사의 시공간을 경계없이 펼쳐 보였다.


T. 모어의 ‘유토피아’에 비견되는 T.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1602)를 깨진 거울의 거대한 풍경으로 구현한 <Civitas Solis II>(2014)를 비롯해서, 기술 진보에 대한 낙관의 상징과도 같았던 힌덴부르그 수소 비행선의 폭발 사고(1937)를 다룬 <Willing To Be Vulnerable - Metalized Balloon> (2015-16)에서 작가는 이기심과 부주의에 의해 초래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유토피아를 지속적으로 꿈꾸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관조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신세대 미술의 기수로, 미술계의 여전사로 불려온 작가 이불은 이제 더욱 깊어진 작품세계로 마스터의 경지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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